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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전해진 것은 고조선시대이므로 한국의 서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 그러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고려시대까지의 진적(眞蹟)도 10여 점에 불과하고 조선시대의 것 역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진필(眞筆) 외에 비갈(碑碣)·금문(金文)·묘지 등을 통해 서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유물로는 전문(塼文)·석각(石刻)·묘지명(墓誌銘)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점제현신사비·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예서·행서·해서 등 여러 가지의 서체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 형태가 각기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어 이 시기의 서예를 다양하게 고찰할 수 있다. 1977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제현신사비>는 한대를 대표하는 예서의 걸작이며, 7m에 달하는 거대한 <광개토왕비>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해서가 아닌 예서이다. 파세(波勢)가 없는 고예로서 특이하며 호탕 웅대하여 동양서예사상 보기 드문 명품이다. 현재 글씨로서 유물은 거의 남은 것이 없고 석각과 불상명(佛像銘) 등 매우 단편적인 것이 전할 뿐인데, 1972년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券)은 당시의 서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서,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는 중국 남조풍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백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글씨가 비교적 크며 서체가 방정하고 힘이 있어서 남조보다는 북조풍이 짙다. 이것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남·북조 모두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삼국통일 이전의 금석유물로는 진흥왕이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을 비롯한 3개소의 순수비(巡狩碑) 및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단양(丹陽)의 적성비(赤城碑) 등이 있다. 그런데 순수비를 제외하고는 글씨·문장·각법이 모두 보잘것없다. 다만 진흥왕순수비는 문장이 유려하고, 장엄할 뿐 아니라 북조풍에 따라 서법에 우아한 품격이 넘쳐 흐른다. 다른 작품들의 서풍 역시 모두 북조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는 왕희지체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당(唐)나라 중엽 이후 해서의 전형적인 규범이 정립됨으로써 그 영향이 통일신라에도 크게 미쳐 말기부터 해서가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행서는 주로 왕희지법, 해서는 구양순법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 양조(兩朝)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초기에는 왕희지의 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영업(靈業)의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감산사석조불상조상기(甘山寺石造佛像造像記)·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와 김생(金生)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捿雲塔碑)의 서체가 모두 왕희지의 서풍을 따르고 있다.

영업의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와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의 명품이며, 김생은 왕희지의 법을 따르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당(初)나라 초기 시대 저수량의 필의를 참작하여 개성이 뚜렷한 서풍을 창안함으로써, 후일 이규보(李奎報)로부터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편 이 시대의 서예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사경(寫經)을 들 수 있는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한국에서 사경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대체로 구양순의 서풍이 짙은 당나라 때의 사경체이다. 말기의 대가로는 최치원(崔致遠)·김언경(金彦卿)·최인연이 있는데, 최치원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쌍계사진감선사비(雙磎寺眞鑑禪師碑)>이다. 이것은 구양순의 아들 구양통(歐陽通)과 매우 비슷한 풍골(風骨)을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못지않게 서예문화가 융성하였다. 그러나 진적으로는 몇 점의 고문서와 말기에 작성된 수십 점의 사경이 남아 있고 그 밖에 진가가 확실하지 않은 명인의 글씨 몇 점이 남아 있을 뿐, 서예자료로 다루어야 할 것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비석과 묘지 등 금석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목판서적의 글씨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서체가 지배적이었으며, 행서는 역시 왕희지풍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중기에 이르러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은 고승 탄연(坦然)이 구양순체 일색이었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안법(顔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비(文殊院碑)> <승가사중수비 (僧伽寺重修碑)>를 썼다. 그러나 12세기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문학·예술 전반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13세기 말엽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후기에는 특히 충렬왕 이후에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 조선 전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1314년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나라 명사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조맹부는 원나라를 대표하는 글씨의 명가로서 충선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중에는 조맹부의 서법을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 명가가 이암·이제현(李齊賢)이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많은 문적과 서화를 들여왔으므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유행된 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고려 말기의 대가로는 이암·한수(韓脩)·권주(權鑄)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암은 특히 송설체를 깊이 터득하여 행서·초서에 뛰어난 대가로서, 문수사장경각비(文殊寺藏經閣碑)의 글씨를 남겼다. 한편 고려시대 서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비갈과 함께 주목받는 것이 묘지이다. 비갈은 지상에 세우는 것이므로 대부분 심력을 쏟아서 쓴 작품인 데 반하여, 묘지는 땅속에 묻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필하여 자연스러운 자세로 쓰는 것이 보통이므로 비갈과는 다른 친근감을 준다. 또한 서체가 다양하고 교졸(巧拙)의 차가 많고, 필자를 밝힌 것은 몇 점에 불과하지만, 모두 정확한 연대가 새겨져 있어 각 시대 서법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가 많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이 다량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다 하여 왕희지체를 본보기로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병행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송설체에 가장 능한 서가는 고려의 이암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이다. 이용의 글씨는 송설체를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을 나타냈다. 당시의 최고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에는 호탕하고 늠름하며 품위 또한 높아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 이전에 서명(書名)이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妾希顔)·성임(成任)·정난종(鄭蘭宗)·소세양(蘇世讓)·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의 문징명·축윤명(祝允明)의 서풍도 들어와 함께 행하여졌다. 그러나 대체로 신라나 고려에 비하면 품격과 기운에서는 다소 쇠퇴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적 추이였다. 한편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조선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그것은 송설체가 외형적인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나머지 박력이 없이 나약한 데로 흐르는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어떠한 변혁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마침내 유학계에서 일기 시작한 복고사상(復古思想)의 경향에 힘입어 왕희지의 서법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가가 한호(韓濩, 1543~1605)이다. 그는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으로. 개성 출생이며.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한호는 왕희지체(王羲之體) 등의 고법(古法)을 바탕으로 부단한 학습과 노력을 통하여 독특한 서풍(書風)의 석봉체(石峯體)를 이루어 냈으며, 국가의 주요문서를 작성하는 사자관(寫字官)의 효시가 되어 직업서가로서의 영역을 구축하는 등 당대의 서예보급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국가의 서사(書寫)업무를 담당하는 사자관으로 활약하면서 선조(宣祖 : 1552~1608)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았고, 특히 1583년 왕명으로 쓴 「해서천자문(楷書千字文)」은 이후 내부(內府)에서 간행·반포되어 석봉체의 보급에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글씨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절찬을 받았다.

석봉체는 선조의 어필(御筆)에 영향을 주는 등 왕실을 비롯하여 도회의 대관(大官)에서부터 시골의 학동(學童)에 이르기까지 민간에 널리 전파 되었으며, 석봉체를 따른 대표적인 인물로 왕실에서는 선조 이외에도 원종(元宗), 인목대비(仁穆大妃), 인조(仁祖), 정명공주(貞明公主) 등이 있고, 민간에서는 오준(吳竣), 김집(金集), 조희일(趙希逸) 등을 들 수 있으며, 사자관으로는 이해룡(李海龍), 이경량(李景良), 한민정(韓敏政 : 한호의 아들) 등이 있다.

한 호 이후 약 1세기 동안 글씨는 기백과 품격이 떨어지고 속기가 배제되지 않았다. 윤순(尹淳)은 각 체에 능하였는데 특히 행서에서 여러 서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 이광사(李匡師)는 새로운 발상으로 서법의 혁신을 시험하여 《원교서결(圓嶠書訣)》을 지어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법의 바른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역량에도 한계가 있어서 필력과 품격이 그의 스승인 윤순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밖에도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는 강세황(姜世晃)이 있는데, 윤순·이광사와 함께 <3대가>라고 불렸으며, 미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18세기 말 청나라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금석학이 발달하면서부터 문자의 근원인 고문·전서·예서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글씨를 쓰는 서가들도 현행하는 해서와 행서 이전의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추구하여, 옛 서체의 운필을 배워 해서와 행서에 임하였다. 청나라 고증학자·금석학자의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신위(申緯) 등이 있고, 이들보다 약간 후진으로는 김정희(金正喜)·권돈인(權敦仁)·이상적(李尙迪)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서예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사람이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다. 실학(實學)과 금석학(金石學)에 큰 업적을 쌓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 등 백여 가지를 썼다. 어려서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또한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중국의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보여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 안진경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모방하여 한동안 구양순체를 썼으나,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前漢隸)에 두고 이 법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전통적인 서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서법을 시도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서법은 파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근대적 미의식의 표현을 충분히 발휘하고 중국 서법에 대한 숭상과 추종으로부터 한국 서예의 자주적인 가능성과 의지를 확연히 나타냈던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추사체는 1840년(헌종6년)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는데, 배되어 그곳에서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함으로써 우리 서예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추사체는 유배 생활의 고통이 엉클어진 듯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특징이 있다. 또한,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모두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제자에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었으나 그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서예를 바탕으로 그림에서도 이른바 남종 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특유의 개성과 천재성이 번득인다. 그는 묵란(墨蘭)과 산수를 잘 그렸고, 예술에 대한 감식안도 당대의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대표작으로는 〈세한도〉와 〈부작란도〉, 〈지란병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