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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韓濩, 1543~1605]
    조선중기의 서예가.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谷縣令)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 최고의 서예가 중 한명이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한호는 왕희지체(王羲之體) 등의 고법(古法)을 바탕으로 부단한 학습과 노력을 통하여 독특한 서풍(書風)의 석봉체(石峯體)를 이루어 냈으며, 국가의 주요문서를 작성하는 사자관(寫字官)의 효시가 되어 직업서가로서의 영역을 구축하는 등 당대의 서예보급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여말선초 이래 유행했던 송설체(松雪體)로부터 전아(典雅)한 필법으로 전환되는 조선중기에 왕희지체(王羲之體) 등의 고법(古法)을 토대로 오랜 공력을 쌓아 숙련된 필치의 강경(剛硬)·단정(端正)한 석봉체 (石峯體)를 이룬 서예가(書藝家)이다. 국가의 서사(書寫)업무를 담당하는 사자관으로 활약하면서 선조(宣祖 : 1552~1608)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았고, 특히 1583년 왕명으로 쓴 「해서천자문(楷書千字文)」은 이후 내부(內府)에서 간행·반포되어 석봉체의 보급에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글씨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절찬을 받았다.

     석봉체는 선조의 어필(御筆)에 영향을 주는 등 왕실을 비롯하여 도회의 대관(大官)에서부터 시골의 학동(學童)에 이르기까지 민간에 널리 전파 되었으며, 석봉체를 따른 대표적인 왕실 인물로, 선조, 원종(元宗), 인목대비(仁穆大妃), 인조(仁祖), 정명공주(貞明公主) 등이 있고, 민간에서는 오준(吳竣), 김집(金集), 조희일(趙希逸) 등을 들 수 있으며, 사자관으로는 이해룡(李海龍), 이경량(李景良), 한민정(韓敏政 : 한호의 아들) 등이 있다.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實學)과 금석학(金石學)에 큰 업적을 쌓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 등 백여 가지를 썼다. 어려서 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24세 때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돈독히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의 소언으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1840년(헌종6년) 9월 27일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제주에서는 대정 교리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9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동안 추사는 지방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가르쳐 주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함으로써 우리 서예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풀려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들어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그가 이룩한 독특한 서체는 그의 학문적인 깊이와 함께 오랜 유배 생활의 고독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서예를 바탕으로 그림에서도 이른바 남종 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특유의 개성과 천재성이 번득인다. 그는 묵란(墨蘭)과 산수를 잘 그렸고, 예술에 대한 감식안도 당대의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대표작으로는 〈세한도〉와 〈부작란도〉, 〈지란병분〉 등이 있다.

이방운 [李昉運, 1761~?]
     조선 후기의 화가. 그림 이외에 거문고도 잘 탔으며, 시문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특히 고사(故事)나 고시(古詩)를 소재로 다룬 것들이 많다. 거의 모든 작품이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바탕으로 하여 담백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으며, 간략화된 형태와 산뜻한 담채(淡彩), 짧은 선과 가는 점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윤곽선, 그리고 간략한 세필 등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본관 함평(咸平). 자 명고(明考). 호는 기야(箕野)·심재(心齋)·순재(淳齋)·순옹(淳翁)·기로(箕老)·심옹(心翁)·심로(心老) 등 여러 가지를 썼다. 그림 이외에 거문고도 잘 탔으며, 시문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로서는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전하는 작품들을 보면 특히 고사(故事)나 고시(古詩)를 소재로 다룬 것들이 많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바탕으로 하여 담백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으며, 그의 화풍은 간략화된 형태와 산뜻한 담채(淡彩), 짧은 선과 가는 점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윤곽선, 그리고 간략한 세필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대표작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빈풍도(??風圖)》,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계도인도(淸溪道人圖)》,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망천심경도(輞川十景圖)》 등이 있다.

소치 허유 [許維, 1809~1892]
     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 ·노치(老癡). 전남 진도(珍島) 출생. 후에 연(鍊)으로 개명하였다. 서화를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 ·그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택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소치(小癡) 허유(1809-1892)는 처음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중국 남종 문인화의 대가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개명하였다.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인 진도로 돌아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산수화 외에도 모란, 사군자, 연꽃, 괴석, 노송, 파초 등 다양한 소재를 능숙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호남 화단의 중요한 맥을 이루고 있다.

     선면산수도는 허유가 만 57세 때인 1866년 여름에 그린 것으로, 만년에 살던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소재로 한 것이다. 방석도산수도는 허유가 그리고 김정희가 발문(跋文)을 썼다. 깔끔한 느낌을 주는 마른 붓질의 수묵에서 문인화다운 품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묵모란은  바위의 강한 표현과 모란의 부드러운 표현이 조화를 이룬다.

정학교 [丁學敎, 1832~1914]

     조선말기의 서화가로서 종4품으로 벼슬은 군수를 지냈다고 하나 정확한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괴석도로 명성을 얻은 화가이다. 그는 안중식(安中植)과 함께 장승업(張承業)의 작품에 대리낙관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괴석과 난초, 대나무가 각각 배치되었는데, 길고 좁은 화면과 종으로 긴 서체와 괴석이 잘 어울린다. 담백하면서도 개성적인 필치로 괴석의 기이한 형상과 질감이 효과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난초와 대나무의 묘사를 보면 필획의 개별성과 서예성은 배제되고 전체적으로 포물선을 그리듯 둥글게 방향을 잡아주고 있어서 각지고 예리한 괴석이 더욱 부각되어 보인다.

     본관 나주(羅州). 일명 학교(鶴喬). 자 화경(化景·花鏡). 호 향수(香壽)·몽인(夢人)·몽중몽인(夢中夢人). 벼슬은 종4품인 군수를 지냈다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글씨는 전(篆)·예(隸)·행(行)·초(草)에 모두 능했으며 광화문의 편액은 그가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은 주로 죽석도(竹石圖)·괴석도(怪石圖) 등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화목(畵目)을 많이 그렸는데,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바위의 특성을 예리하게 포착, 묘사하고 있다. 유작으로는 《청수상의죽석도(淸壽相倚竹石圖)》 《기암고용도(奇巖孤聳圖)》 외에도 《죽석도》 《괴석도》 등 다수가 전한다.

김성근 [金聲根, 1835~1918]

     한말의 문신, 서예가(書藝家). 본관 안동(安東). 자 중원(仲遠). 호 해사(海士). 1862년(철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901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홍문관학사를 지냈으며,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자작(子爵)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지운영 [池運永, 1852~1935]
     조선후기의 서화가로 유·불·선에 통달했고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으며 특히 해서와 산수화·인물화에 뛰어났다. 본관 충주. 호 설봉(雪峰) ·백련(百蓮). 1884년(고종 21) 통리군국아문주사(統理軍國衙門主事)가 되고, 1886년 사대당 정부의 극비지령을 받아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로서 도일, 도쿄[東京] ·요코하마[橫濱] 등지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암살을 꾀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비밀문서 ·비수 등은 압수당하고 본국에 압송,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1889년 풀려나와 운영(雲英)으로 개명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유 ·불 ·선에 통달했고, 시 ·서 ·화에도 뛰어나 삼절로 불리었다. 글씨는 해서에, 그림은 산수 ·인물에 능했다. 주요작품에 《후적벽부도》 《신선도》 등이 있다.

     1921년 서화협회(書畵協會) 정회원으로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였으며, 1922년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인탁족도 山人濯足圖〉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옛 그림들로 임모(臨模)하여 기량을 길렀으며, 특히 산수인물을 잘 그렸다. 그의 화풍은 대체로 중국풍이 짙은 북종(北宗)·원체적(院體的)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독창적인 화풍은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인물과 산수를 적절히 배치하는 구성력은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후적벽부도 後赤壁賦圖〉·〈남극노인수성도 南極老人壽星圖〉·〈동파선생입기도 東坡先生笠기圖〉 등이 있다. 그의 아들도 지성채는 화가이다.

박기양 [朴箕陽, 1856~1932]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금(琴) ·기(棋) ·서(書) ·화(畵)에 능하고 특히 행서(行書)와 묵죽(墨竹)에 뛰어났으며 수차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評議員)이 되었다.본관 반남(潘南). 자 범오(範五). 호 석운(石雲) ·쌍오거사(雙梧居士).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에 급제, 설서(說書) ·형조참판 등을 거쳐 경기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비롯,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고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이 되었다. 1899년(광무 3) 궁내부 대신서리(大臣署理)에 이어 규장각 제학(提學)을 지내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을 받았다. 1921년 경학원 부제학(經學院副提學)을 지내고, 1925년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다. 금(琴) ·기(棋) ·서(書) ·화(畵)에 능하고 특히 행서(行書)와 묵죽(墨竹)에 뛰어났으며 수차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評議員)이 되었다. 작품에 《금강산건봉사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金剛山乾鳳寺釋迦如來靈牙塔奉安碑)》의 글씨가 있다.

민병석 [閔丙奭, 1858~1940]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일제강점기의 친일 정치인. 서화에 뛰어났고,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서울 광화문의 '고종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를 썼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의재(毅齋)이다. 아버지는 경식(京植)이며,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閔復基)의 부친이다. 1879년(고종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1883년 승지(承旨), 1884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에 등용되었다. 같은 해 수구당(守舊黨)의 일원으로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한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장은규(張殷奎)를 자객으로 보내 암살하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그 뒤 대사성(大司成)·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제도국총재(制度局總裁)·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고,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 후에는 일본 정부의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이 되었으며, 1939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부의장을 지내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서화에 뛰어났고,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서울 광화문의 '고종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를 썼다. 편서(編書)에는 《덕행교범(德行敎範)》이 있다.


유창환 [兪昌煥, 1870~1935]

     조선후기의 서예가. 문장에 뛰어났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각체를 두루 썼으나 특히 초서에 능하여 이름을 날리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였다. 본관 기계(杞溪). 초명 명환(明煥). 자 주백(周伯) 또는 준백(準伯). 호 우당(愚堂)·육일거사(六一居士)·홍엽산방주인(紅葉山房主人)·성동초자(城東樵者). 문장에 뛰어났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각체를 두루 썼으나 특히 초서에 능하여 이름을 날리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였다. 필적으로는 경상남도 사천에 있는 《침산정기덕비(枕山亭紀德碑)》를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이종석송덕비(李鍾奭頌德碑)》 《한규설묘표(韓圭卨墓表)》 등이 있다.

오세창 [吳世昌, 1864.7.15~1953.4.16]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본관 해주(海州). 호 위창(葦滄). 본명 중명(仲銘).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하다가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농상공부 참의(參議)·우정국 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1902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양한묵(梁漢默)·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1906년 귀국,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별세,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저서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택기 [閔宅基, 1908~1936]

     한국의 서화가(書畵家). 시 ·서 ·화를 모두 잘 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난죽(蘭竹)과 전각(篆刻)에 특히 뛰어났다. 호 설해(雪海).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 서울에서 김규진(金圭鎭)에게 서화를 사사, 시 ·서 ·화를 모두 잘 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난죽(蘭竹)과 전각(篆刻)에 특히 뛰어났다.

현중화 [玄中和,1908∼1996]
    호는 소암(素菴).  제주 서귀포 출신으로 전-예-해-형-초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서예의 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