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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1713-1791)
강세황(1713-1791)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서화가이며 평론가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또는 첨재이다. 60세가 넘어서야 벼슬을 살기 시작하였고, 72세 때인 1784년에는 천추부사로 연경에 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세황은 특히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진경산수의 발전과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생 동안 습기(習氣)나 속기(俗氣)가 없는 문인화의 경지를 추구하여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를 통해 그의 그림에 대한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의 현존 작품도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많아 그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여러 산수화첩 외에 자화상을 비롯한 여러 폭의 초상화도 남기고 있는데, 자화상은 그가 묘사력도 뛰어난 화가임을 보여준다. 진경의 표현에도 관심을 두어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과 같은 독특한 느낌의 진경 산수 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벽오청서도〉와 〈피금정도〉 등이 유명하다.
   
김규진 (1868∼1933)
서화가(書畵家).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백운거사(白雲居士)·취옹(醉翁)·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본관은 남평(南平). 평안남도 중화(中和) 출생. 벼슬은 시종관(侍從官)을 지냈다. 8세 때 외숙인 소남(小南)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다. 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10여 년간 진(秦)·한(漢)·당(唐)·송(宋)의 서화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으며, 귀국 후 고종의 어명으로 왕세자 영친왕(英親王)의 스승이 되어 서화를 가르쳤다. 한편,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와 어전사진사(御前寫眞師)가 되었으며, 1903년 한국 최초로 종로(鍾路)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기도 하였다. 1913년에는 화랑 <고금서화관>을 개설하였으며 1915년에는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과 함께 <서화연구회>라는 3년 과정의 사설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글씨는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의 서(書)에 있어서 모두 묘경(妙境)에 달하였고, 그림은 산수(山水)·화조(花鳥)·난죽(蘭竹)에 뛰어났으며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또한 대자(大字)를 잘 써서 전국의 궁전·명승고적·사찰·정사누대마다 그의 필적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저서로 《서법진결(書法眞訣)》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 《육체필론(六體筆論)》 등이, 글씨로는 《법기보살(法起菩薩;內金剛)》 《금수강산(錦繡江山;平壤 浮碧樓)》 《보신각(普信閣;서울 鍾路)》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陜川 海印寺)》 《촉석루(矗石樓;晉州)》 등이, 그림으로는 《외금강만물상도(外金剛萬物相圖)》 《해금강총석정도(海金剛叢石亭圖)》 《대부귀길상도(大富貴吉祥圖)》 《천하기절(天下奇絶)》 등이 전한다.
     
김은호 (1892-1979)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는 전통적인 한국화를 그렸으며, 인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글씨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유했던 집안이 몰락하자, 1912년 서화미술원에서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으로부터 그림을 배워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이름을 날렸다.
변관식과 함께 동경 유학을 떠나 동경 미술학교를 3년 수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1936년 후소회라는 미술 단체를 창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가 어용 화사로 출발한 만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일본풍의 인물화와 흰 분을 칠한 가녀린 여인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남원에 있는 춘향 사당과 진주의 논개 사당 등 곳곳의 영정도 많이 그렸다.
산수화는 채색 위주의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일제시대 일본 천왕에 충성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친일파 화가로 불려지기도 하지만,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근대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이 크다. 순종초상(純宗肖像) 1913, 자화상 (自畵像) 1925, 간성 1927, 장고무 (長鼓舞) 1965, 무희 (舞姬) 1968, 해학도 (海鶴圖) 1965, 호상지락 (濠上知樂)1970 등의 작품이 있다.
     
김정희 (1786-1856)
김정희(1786-1856)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實學)과 금석학(金石學)에 큰 업적을 쌓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 등 백여 가지를 썼다. 어려서 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24세 때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 등과 돈독히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1840년에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에서 그는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함으로써 우리 서예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가 이룩한 독특한 서체는 그의 학문적인 깊이와 함께 오랜 유배 생활의 고독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서예를 바탕으로 그림에서도 이른바 남종 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특유의 개성과 천재성이 번득인다.
그는 묵란(墨蘭)과 산수를 잘 그렸고, 예술에 대한 감식안도 당대의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문인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당시 화단에 만연해 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등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로써 모처럼 일어난 민족적인 화풍의 세가 꺾이고 다시금 전통적인 문인화풍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세한도〉와 〈부작란도〉, 〈지란병분〉 등이 있다.
       
김홍도 (1745-1816 이후)
김홍도(1745-1816 이후)는 자를 사능(士能), 호를 단원(檀園), 단구(檀丘), 서호(西湖)라 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이다. 당대의 평론가이자 문인 화가인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와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고, 그로 인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연풍 현감까지 지냈다.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일반에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남종화, 평생도, 신선도, 풍속화, 도석인물화, 화조화(花鳥畵), 진경산수,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그의 산수화는 여백을 적절히 남기면서 대상을 압축하는 밀도있는 구도법과형상을 집약해서 표현해 내는 묘사력, 그리고 운치있는 운염법 등으로 김홍도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가 하나로 만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보여주었다. 그가 이룩한 속화(俗畵) 양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후배들이 그대로 추종하여 그의아들인 긍원 김양기, 임당 백은배, 혜산 유숙, 시산 유운홍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산수도에서는 정선(鄭敾)이나 김응환(金應煥)의 영향이 다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는 실경을 소재로 단원법이라 부를 만큼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산수뿐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굵고 힘찬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도 특징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 풍속화이다. 그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를 써서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군선도팔곡병〉<총석정도> <도우도> <두보시의신선도> <군현도> <주상관매도> 와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가 가득찬 25면으로 구성된《풍속화첩》 외에 여러 산수화첩이 있다.
     
변관식 (1899-1978)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8)은 조선 왕조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趙錫晉)의 외손자이다.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1910년 1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조석진이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25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수묵화풍을 접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사생하는 등 새로운 화풍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얻은 실경에 대한 애착으로 향토색 짙은 독특한 실경산수(實景山水)가 발전하게 된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관여하기도 했다. 1956년 국전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그는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혼탁한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자 점심식사자리에서 냉면 놋대접을 집어던져 심산 노수현의 눈두덩을 찢고 말았다.
당시 '연합신문'에 국전심사의 불공정성을 폭로한 글을 기고한 후 그는 두번 다시 심사위원을 맡지 않고 .재야 화가로서 화업에만 몰두하고 지냈다.
그의 화풍은 마른 붓질을 더해 짙고 거친 분위기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관념속에 이상화한 산수가 아닌 현실의 산수를 그린 실경산수화가고 또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는 변관식은 정선 이후 금강산 그림을 가장 잘 그린 작가로도 꼽힌다. 그와 함께 근대 전통회화의 거목으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이 모범생같은 삶 속에서 안온하고 순응적인 농촌풍경들을 그렸다면 변관식은 기기개가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그렸다.
개인사에서도 저항적인 풍모가 강했다. 인간사의 속됨을 싫어했고 방랑벽이 심했다. 평생 야인을 자처한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편안한 청전의 그림에 가리어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소정양식'의 요체는 멱을 엷게 찍어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먹을 켜켜이 올려가는 적묵법과 진한 먹을 튀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는 파선법의 질박한 터치. 여기에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구도, 해학적인 인물상 등은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한국인의 심성에 더없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작품으로는 외금강 옥류천(外金剛玉流泉),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巖), 누각청류, 비폭도(飛瀑圖), 내금강 진주담, 설경산수(雪景山水), 만추(晩秋), 강촌유거(江村幽居) 등이 전한다.
     
신윤복 (1758-?)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 김홍도(金弘道)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신윤복(1758-?)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으로 화원이었던 신한평(申漢枰)의 아들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가 도화서 화원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산수화에서도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기량이 뛰어난 쪽은 역시 낭만적인 풍속화이다. 그러나 그의 풍속화는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 방법,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색을 쓰는 법 등에서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주로 다루었던 반면, 그는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리고 이러한 남녀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한 까닭에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림의 주제가 너무 선명하여 때로는 오늘날 보기에도 낯이 붉어질 내용도 적지 않으나, 그 의 천재성은 이처럼 에로틱한 장면도 절제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의 춘화도는 짐짓 눙치며 익살을 떠는 은근함이 있고, 여인상은조선 여인만의 깔끔하면서도 요염한 멋을 남겨놓았다. 또한 그의 풍속화는 당시의 살림살이와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어 당시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의 작품으로는 대표작인 〈미인도〉<단오도> <선유도> <연상의여인> <월하정인>외에 많은 수의 풍속화가 전한다.
     
안중식 (1861-1919)
안중식(1861-1919)은 어렸을 때 이름이 종식(鍾植)이고 별명이 욱상(昱相)이었으며, 심전(心田)이라는 호 이외에도 심전경부(心田耕夫), 경묵도인(耕墨道人), 말년에는 불불옹(不不翁) 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개화파인 김윤식(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제도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텐진(天津)에 다녀 왔다.
이때 서구의 과학적인 소묘법을 익혔고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피난한 적도 있고, 그 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의 서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내외를 다니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근대적 입장을 지녔다.
그는 장승업에 이어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잘 그렸다. 그래서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 제작에 발탁되기도 하는 등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다.
따라서 그의 회화 가운데는 중국의 고사나 화보를 탈피하지 못한 그림이 많았지만, 조석진과 더불어 근대 화단을 연 화가로 주목된다. 대표작으로는 〈도원문진〉과 〈백악춘효도〉 외에 많은 수가 전한다.
     
유숙 (1827-1873)
유숙(1827-1873)은 조선시대 말기의 도화서 화원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자는 선영(善永), 호는 혜산(蕙山)이다. 1852년과 1861년에 철종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였고, 1872년에는 고종의 초상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당대의 화가 전기(田琦), 김수철(金秀哲), 이한철(李漢喆), 유재소(劉在韶) 등과 교류하면서 김정희(金正喜)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실제로 본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도 있으나 대부분 김정희 풍의 문인화 계열의 그림이며, 풍속화에서는 김홍도와 연관되는 면도 보인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쾌도(大快圖)〉는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김홍도의 여운을 남기면서 조선 후기 풍속화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그는 산수와 함께 영모(翎毛), 도석인물(道釋人物) 등에도 뛰어났다. 대표작으로는 〈대쾌도(大快圖)〉와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 〈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 등이 있다.
   
윤용구 (1897-1972)
윤용구는 문신·서화가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며, 두수(斗壽)의 10 대손이다.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인(獐位山人)이다. 그는 15세에 돈령부(敦寧府) 직장을 지내고,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는 후에 규장각에 들어가 상대(常帶), 한림(翰林), 대교(待敎), 직각(直閣), 사인부제학(舍人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 도승지,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에 수차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고 은거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誤)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수경(瘦勁:가늘면서 힘찬)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 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
     
이상범 (1861-1919)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은 충남 공주의 몰락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당시 학비를 받지 않던 서화미술원에 입학하였다.
미술원을 수료한 후 스승인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에서 계속 화업을 쌓았다.
1923년에는 이용우, 노수현, 변관식(卞寬植)과 더불어 동연사를 조직하고 정체되어 있던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 다니던중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자택에 설립한 청전화숙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1950년부터 1961년까지는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의 화풍은 초기에는 스승인 안중식의 화풍을 따르다가, 1923년 무렵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하여 옆으로 길게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5년부터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두 단의 간단한 구도 속에 배치하고 엷은 먹에서 차츰 진한 먹으로 옮아가는 농담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자신의 세계로 승화시켰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잘 표현하였다.
작품으로는 <산가설한>,<모추>, <설악산>, <모운>,<계산청취>, <고성모추> 등이 전한다
       
이용우 (1902-1953)
이용우(1902-1953)는 서울 출생으로, 호는 묵로(墨鷺) 혹은 춘전(春田)이다. 1911년 서화미술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미술 수업을 받았고, 1918년 16세 때 최연소로 서화협회의 정회원이 되었다.
1923년에는 이상범(李象範), 변관식(卞寬植) 등과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또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를 통해 활동하였다. 해방 무렵 강릉사범학교 미술 교사를 지냈고,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는데, 6.25 때 전주로 피난을 가 그곳에서 타계하였다. 분방한 성격으로 활달한 필치를 구사하였으며, 특히 산수와 화조를 잘하였다
       
이응로 (1905-1989)
이응로(1905-1989)는 전통적 한국화를 전공했으며 충남 예산 출생으로 호는 고암(顧菴) 혹은 죽사(竹史)라 하였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한 후 일본의 가와바다(川端) 화학교(畵學校)를 수료하였다.
초기에는 사군자와 문인화 계통의 산수화를 주로 그렸으며,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고,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여 동양화를 지도하였다. 파리의 파켓티 화랑에 의해 유능한 작가로 인정을 받게 된 후 1963년 살롱 도톤느 전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1967년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보기 위해 북한을 다녀온 것이 빌미가 되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옥고를 치르고, 1969년 재차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파리에 정착한 이래 그는 회화적 기법과 재료에 대한 갖가지 실험을 하게 되는데, 목각, 타피스트리, 빠삐에 꼴레 등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그 후 그는 글씨, 특히 한자를 해체하거나 변형하여 특이한 추상적 효과를 낸 <문자 추상화>로 동양적 정서를 표현해내었다. 또한 먹을 이용해 많은 사람이 움직이거나 춤을 추는 것 같은 독특한 표현을 하기도 하였으며, 후에는 한글의 자획을 해체하여 추상 작업을 하였다.
1989년 그에 대한 오해가 풀려 고국에서 대대적인 전시회가 열리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기로 한 며칠 전 아쉽게도 85세의 노화가는 세상을 떠났다.
       
이인문 (1745-1821)
이인문(1745-1821)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로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문욱(文郁), 호는 고송류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또는 유춘(有春)이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지냈다.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으로 함께 도화서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고, 당시 문인 화가였던 강세황, 신위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산수, 영모(翎毛), 포도, 도석인물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당시 크게 유행하였던 진경산수나 풍속화보다는 전통적인 소재를 즐겨 그렸다. 특히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길이가 8m 56cm에 달하는 거작으로 그의 회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강촌청우도(江村晴雨圖)> 를 비롯한 많은 산수화가 전한다.
     
이하응 (1820-1898)
이하응(1820-1898)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더 잘 알려진 고종의 아버지로, 자를 시백(時伯), 호를 석파(石坡)라 하였다. 그는 영조(英祖)의 현손인 남현군 구(球)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고 왕실 종친에게 갖은 위협을 가하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탕아 같은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왕궁내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후계 없이 돌아간 철종의 뒤를 이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하였다. 이 이가 바로 고종이다. 그는 고종의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당대의 서화가로서도 유명하였는데, 글씨도 잘 썼지만 특히 난초를 잘 그려 이름을 떨쳤다.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었던 김정희는 그의 난 그림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장승업 (1843-1897)
장승업(1843-1897)은 조선시대 말기 한국 회화를 꽃피운 최대의 거장이다. 그의 자는 경유(景猶), 호는 오원(吾園) 또는 취명거사(醉瞑居士) 등이다. 그의 생애와 성품에 관해서는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에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이응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살았다. 글은 배우지 못했으나 그 집 아이들의 글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글을 이해했다. 또 그 집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원,명대의 유명한 회화 작품들을 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신이 통한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려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이름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아 궁중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호탕하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여, 몹시 취하여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기질은 작품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는 산수(山水), 인물(人物), 영모(翎毛), 기명절지, 사군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다. 화풍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호방하고 활달하여 격조 면에서보다는 기량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방황자구법산수도>, <귀거래도>, <호취도> 등이 전한다.
   
장우성
호는 월전(月田). 경기도 여주(驪州) 출생. 1930년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입선한 이후 계속 출품하였으며, 이듬해 육교한어학교(六橋漢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941∼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 4회 특선하여 추천작가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 1946∼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 사이 미국 국무부화랑 개인전을 비롯하여 많은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1965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 운영위원에 피선되고 1971∼197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1980년 프랑스 파리 세루뉘시미술관 개인전, 1982년 독일 쾰른 시립미술관 개인전,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1988년 일본 도쿄[東京(동경)] 아트포럼 특별초대전 등을 가졌다. 서울특별시문화상·예술원상·5·16민족상·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으며, 작품으로는 《이충무공영정(李忠武公影幀)》 《성모자상(聖母子像)》 《백두산천지(白頭山天池)》 《군려도(群麗圖)》 및 김유신(金庾信)·강감찬(姜邯贊)·정몽주(鄭夢周)·문익점(文益隷)·김종직(金宗直)·조식(曺植)·유관순(柳寬順) 등의 영정이 있다.
   
정선 (1676-1759)
정선(1676-1759)의 산수화를 보면 당시 조선의 산하(山河)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진경산수화라 하는 그의 산수화는 산천을 두루 여행하며 얻은 자연에 대한 감동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천재 화가의 손을 통해 나온 만큼 보는 이의 감동 또한 크다.
그의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이며, 가세가 몰락한 한미한 양반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집(金昌集) 형제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올라 양천 현감(楊川縣監) 등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는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도 긴밀한 교유를 하였는데, 이들과의 사귐은 그의 회화 세계를 넓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그리는 진경산수를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필묵법으로 화면에 담아내었다. 강한 직선의 수직준법, 대담한 산형의 변형, 굵은 미점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연미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그는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는 〈금강전도(金剛全圖)〉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한 많은 작품이 전한다.
       
지운영 (1852∼1935)
조선 말기 서화가. 호는 설봉(雪峰)·백련(白蓮). 본관은 충주(忠州). 의학자 석영(錫永)의 형이다.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여항문인(閭巷文人)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시문 등을 배웠다. 1884년(고종 21)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가 되고, 1886년 사대당(事大黨) 정부의 밀령을 받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본국에 압송,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1895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재기를 꿈꾸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둔하며 시와 그림에 몰두하였다. 유·불·선에 통하였고,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대표작으로 《후적벽부도(後赤壁賦圖)》 《남극노인수성도(南極老人壽星圖)》 《동파선생입기도》 등이 있다.
     
채용신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한국의 화가로, 본명은 동근(東根), 자는 대유(大有),
호는 석지(石芝)·석강(石江)·정산(定山)이다.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는 돌산진수군첨절제사(突山鎭水軍僉節制使)를 역임한 채권영(蔡權永)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초상화 제작은 중인 출신의 도화서 화원의 차지였다. 1886년 무과에 급제하여 20년 넘게 관직에 종사,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뛰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초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로,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채석지 필법'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였다.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세부 묘사에 주력하고, 많은 필선을 사용하여 요철·원근·명암 등을 표현한 점 등이다. 채용신은 관례를 깨고 양반 초상화는 물론 비양반 여인의 인물화도 제작해 눈길을 모은다. 1905년 관직을 마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와 익산·변산·고부·나주·남원 등지를 다니면서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 1941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3년에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주선으로 6월 4일부터 10일까지 서울의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이하응(李昰應)·최익현(崔益鉉)·김영상(金永相)·전우(田愚)·황현(黃玹)·최치원(崔致遠)등의 초상과《고종대한제국동가도 (高宗大韓帝國動駕圖)》등을 그렸으며,《운낭자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황장길부인상 (黃長吉夫人像)》등 여인상도 그렸다. 이 중《운낭자27세상》《최익현초상》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허건
호는 남농(南農).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생.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출품하여 입선하고, 1944년 같은 전람회에서 특선을 하였다.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이 되었다. 1976년 남농상(南農賞)을 제정하고, 대한민국 문예예술상을 받았다. 1981년 개인소장품 1656점을 목포시(木浦市)에 기증하였으며, 1983년 예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조선 말기 남화(南畵)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 아버지는 미산(米山) 허형이며 3대째 남화의 맥을 잇는 회화사적인 배경은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허백련 (1891-1977)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은 전라남도 진도 출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의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에서 법정학을 전공하다가 그림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고향인 진도에서 그의 집안 어른인 19세기의 대화가 허유(許維)의 아들인 허형에게서 묵화의 기초를 익히게 된 것이 그가 전공을 바꿔 화가가 된 원인이 되었다. 그는 일본 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전통 남종 산수화를 지향하였다. 유학 후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을 하여 각광을 받았고, 1927년 이후에는 전남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화필 생활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38년에는 연진회라는 미술 단체를 발족시켜 호남 서화계에 상징적인 화가로 추앙되었다. 그는 한시와 고전화론(古典畵論)에 통달하고 서법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서화 삼절의 전형적인 문인 화가였다.
       
허유 (1861-1919)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小癡) 허유는 중국의 남종화풍이 우리 화단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처음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중국 남종 문인화의 대가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개명하였다.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초년에는 해남 윤선도의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 화풍을 익혔다.
이후 대둔사(大屯寺) 초의 선사의 소개로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다.
김정희로부터 중국의 미불, 황공망, 예찬, 석도 등의 화풍을 배우고, 김정희의 서체도 전수받으며 남종 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는데,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雲林山房)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節)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그는 산수화 외에도 모란, 사군자, 연꽃, 괴석, 노송, 파초 등 다양한 소재를 능숙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호남 화단의 중요한 맥을 이루고 있다.
       
석봉 한호 (1543~1605)
개성(開城) 출신으로 알려진 한호는 군수(郡守) 한대기(韓大基)의 5대 손이자 정랑(正郞) 한관(韓寬)의
손자로 본관은 삼화(三和)이고, 자는 경홍(景洪)이며,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1567년(명종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주요문서와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으며, 와서별제(瓦署別提)·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가평군수(加平君守)·흡곡현령( 谷縣令) 등을 지냈다.
한호는 여말선초 이래 유행했던 송설체(松雪體)로부터 전아(典雅)한 필법으로 전환되는 조선중기에
왕희지체(王羲之體) 등의 고법(古法)을 토대로 오랜 공력을 쌓아 숙련된 필치의 강경(剛硬)·단정(端正)한
석봉체 (石峯體)를 이룬 서예가(書藝家)이다.
선조(宣祖 : 1552~1608)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았고, 특히 1583년 왕명으로 쓴 「해서천자문(楷書千字文)」은 이후 내부(內府)에서 간행·반포되어 석봉체의 보급에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글씨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절찬을 받았다.
석봉체는 선조의 어필(御筆)에 영향을 주는 등 왕실을 비롯하여 도회의 대관(大官)에서부터 시골의 학동(學童)에 이르기까지 민간에 널리 전파 되었으며, 석봉체를 따른 대표적인 인물로 왕실에서는 선조 이외에도 원종(元宗), 인목대비(仁穆大妃), 인조(仁祖), 정명공주(貞明公主) 등이 있고, 민간에서는 오준(吳竣), 김집(金集), 조희일(趙希逸) 등을 들 수 있으며, 사자관으로는 이해룡(李海龍), 이경량(李景良), 한민정(韓敏政 : 한호의 아들) 등이 있다.
한편 한호는 선조대에 확립된 사자관의 효시가 되어 이후 직업서가의 전형으로서 후대의 사자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고법에 대한 그의 인식과 학습은 후대의 서가들을 계발시켜 조선중기 서풍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밖에 그의 필적으로는 다수의 진적(珍籍)과 함께 각본(刻本), 금석문 (金石文), 편액(扁額)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석봉의 성공에는 '떡썰기와 글쓰기 시합' 등 엄한 가르침의 일화를 감명깊은 교훈으로 남긴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