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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진경(眞境),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신조 선산수화(新朝鮮山水畵)라고도 했다. 이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새로운 화풍을 창 출한 가운데 발달하였다.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 의 사상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또 한국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과 접목시키고자 한 문인 사대부 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전대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 와 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류(野外雅集類)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한양 근교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곁들인 것으로, 이는 정선(鄭敾)에 의하 여 개발되었다. 그는 실제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그려 진경산수화풍의 정형 (定型)을 수립한 것이다. 즉, 금강산과 영남지방 및 서울 근교일대를 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 현, 새로운화격을 이룩함으로써 전통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고, 진경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했다.

그의 진경화풍은 기존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실경의 단순한 재 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큰 특색이 있다. 그리고 양식적 으로는 부감법(俯瞰法)의 시각에 동적인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한 화면구성법을 비롯하여 부드러운 피마준법(皮麻 法)과 듬성한 태점(苔點), 괴량감 넘치는 짙은 적묵(積墨)의 바위와 능란한 편필(偏筆)의 스케치풍 소나무 묘사법 등 이 특징적이다.

특히 금강산 화법에서는 예각적인 바위 봉우리들을 날카로운 수직준(垂直)으로 요약하여 굳세고 빼어난 골기(骨氣) 를 나타낸 다음, 이를 토산(土山)의 부드러운 미점(米點)과 대조시켜 만물을 생성화육하게 하는 원동력인 음양의 조 화처럼 보이도록 했다.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김유성(金有聲)·최북(崔北)·정충엽(鄭忠燁)·장시흥(張始興)· 김응환(金應煥)·김석신(金碩臣)·김득신(金得臣)·거연당(居然堂) 등 주로 중인층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鄭敾派)라는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통신사절단을 따라도일했던 최북과 김유성을 통해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남화가인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우라카미 교쿠토[浦上玉堂]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민화의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의 양식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강세황(姜世晃) 등의 화가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형식화된 당시의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한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이러한 화풍은 김홍 도(金弘道)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다시 이인문(李寅 文)·이재관(李在寬) 등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정선과 김홍도파 이외에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조류 를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 높은 화풍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려 하였던 근대지향적 인 의의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다시 근대 및 현대에 생긴 어떠한 특정 경관 이 아닌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김석신(金碩臣)의 《도봉산도》, 이인상의 《구룡연도(九龍淵圖)》,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松都紀行名勝圖帖)》, 김홍도의 《사군첩》,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斷髮令金剛全圖)》, 조정규(趙廷奎)의 《금강산병풍》 등이 있다
 
풍속화란 일정한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풍속 ·취미 ·일상생활의 모습 등을 제재(題材)로 그린 그림이다. 우리나라 풍속화는 조선문화 일대 번성기였던 15C에 이은 18C 문예 중흥기 시절 윤두서·조영석 등에 의해 등장하여 김홍도·신윤복·김득신 등 3대 풍속화가를 중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면서 하나의 확고한 장르로 자리 잡는다. '실학'이 당시를 대표하는 철학과 사상이고, '여항(閭巷)문학·위항(委巷)문학'(중인[中人]이나 서리[胥吏]들을 중심으로 시사 [詩社]를 결성하고 산과 강을 찾아 동인 문학활동을 펴나갔으며 사대부 문학과는 다른 활기찬 현실문학을 꽃피움. 특히 김수장은 시조·가사를 집대성하기도 함)과 서민문학(庶民文學.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나 본연의 모습을 긍정 하는 천기[天機] 또는 진기[眞機]주의 문학관에 바탕함. 17C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비롯 18C 들어서는 춘향전·심청 전·장화홍련전 등의 숱한 작품들을 남김)이 당시를 대표하는 문학이라면, 민족화로서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것이 '풍속화'인 셈이다.

진경 산수화의 흐름이 조선의 자연을 그린 것이라면 풍속화는 조선의 인간과 사회를 그린 진경 풍속화인 것
이다. 이러한 조선중심의 실용적·사실적 사조와 화풍이 가능했던 것은 절대군주였던 영조와 정조가 한문화의 원형을 추구 하면서 사실주의·진경시대를 강력하게 주도했고 후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조선이나 주변국의 정밀한 묘사 가 다각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윤두서가 동국여지지도·일본여도 등을 그리는 등 다수의 지도가 제작되어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지리전략적 사고가 가능했으며 과학·기술, 농업, 상업 등의 발전이 눈부시게 진행되었고, 일반 시민들은 점차 농토도 늘이고 부(富)도 축적하면서 대체로 넉넉한 생활수준을 유지했고 미술품·골동품 소장 열기가 일어나는 등 문화적 흐름도 왕성했다.

원래 풍속화는 정선을 시초로 조선의 산수를 배경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나 임금이나 사대부 등의 초상화를 주로 그려담은 「채색초상화」와는 달리, 이땅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놓은 그림이다. 특히 동시대에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삶과 사회상을 철저한 사실주의적 접근으로 충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보 니 자연 그림이 우리 생활속으로 주변으로 가깝게 다가왔기에 친근감이 강하게 든다. 풍속화에서 김홍도(金弘道. 17 45∼?)는 그 대표다. 신선도·산수화·인물화·판화·탱화 등 어느 분야 가릴 것 없이 그림 예술을 다 손댔지만 풍속화가로 서 그의 이름이 가장 높고 확고하다. 특히 '俗'을 잘 그려 묘사했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의 특징은 씨름·글을 배우는 서당·장터 등이 배경이 되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정밀하게 묘사되는 점이다. 이외에도 당시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그린 작품들로 대장간·기와잇기·무동·벼타작·새참·주막·활쏘기 등 다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사민(四民)중에서 삼민(三民) 즉 농민, 장사치, 장인(匠人) 등의 생활과 애환을 주된 주제로 삼고, 기 생·동물에 이르기까지 우리 땅에 있는 여러 모습을 그려 담았다. 지금도 「풍속도첩」은 그 백미로 꼽혀지고 있다. 그의 그림은 정밀함에서 출발하여 시원스럽고 힘이 넘친다. 그리고 남의 장점에 연연해서 보기 좋게 그리기에 쫓기 기보다는 특징적인 모습, 더러는 가장 못난 부분이나 모습도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실학파의 사조와 기풍에 영향 받은 그로서는 사실성 중시란 기조를 항상 잃지 않는다. 이런 중에 늘 노력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재창 조의 세계를 끊임없이 펼쳐 나간다. 그는 스승 복헌 김응환에게서 배우기는 하지만 화풍은 단연코 달리하며 극복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조 과정이었다. 특히 그는 1794년에 정조의 신임으로 연풍현감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정조 의 밀명을 수행하는 한편 도슈사이 사라쿠(東洲제寫樂)란 이름으로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 배우들의 얼굴을 새긴 판 화 150여점을 남겨 일본과 유럽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회화에 한 획을 긋기도 한다.

신윤복(申潤福. 1758∼?)은 김홍도와 더불어 손꼽는 대표적인 풍속화가다. 그도 여느 화가들처럼 산수와 인물, 동물 그림, 글씨까지 남겼지만 역시 백미는 풍속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여인(미인도라고도 함), 처네쓴 여인, 니승영기 무녀신무, 쌍륙삼매, 기방무사, 쌍검대부, 주유청강, 청금쌍련, 단오풍정, 주자거배 등이 있다. 그는 상류사회의 적나 라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고 화사함이 넘치는 세련미의 풍속화를 그렸다. 다른 무엇보다 '여인(女人)'과 '색(色)'을 통해 진한 풍속화를 뿌려 놓았다. 또한 빨강·노랑·파랑이라는 강렬한 한민족의 전통 3원색을 주조로 온갖 현란한 색을 곁들여 묘사했다. 그리고 도시와 강·산 등을 배경으로 남녀의 풍류생활을 즐겨 그렸다. 우물가와 빨래터, 주막과 명문가의 후원 등 머무르는 곳 없이 배경이 된다.

그런데 조선의 보수적 사회상에 비추어 보면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행태는 놀랍다. 남녀간에서 배여나는 색정을 묘사 함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인 것이다. 놀기에 여념없는 한량들과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기생의 모습은 급진적이고 파 격적인 느낌일 들 정도다. 그러다보니 신윤복은 점잖치 못한 그림을 그렸다하여 쫒겨 나기도 한다. 그러나 관념적 판단에서만 벗어나면 선정성에도 불구하고 회화예술의 차원에서 볼 때 그 예술적 가치가 손색없다. 또한 적나라함과 강한 색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따뜻한 웃음, 익살스러움과 해학, 인간 천부의 본성에 대한 긍정, 밝은 모습 등을 일관 되게 유지한다. 지금은 '혜원전신첩(惠圓傳神帖. 30폭 짜리로 국보 135호)'·'여속도첩(女俗圖帖. 6점)'·'행려풍속도병 (行旅風俗圖屛. 4폭 짜리)'등을 비롯해 50여점이 남아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투전·병아리 채가는 고양이 등을 그린 김득신(金得臣. 1754∼1822) 등 여러 풍속화가 들이 등장해 18C 조선 시민들의 삶과 당시 사회상을 묘사하면서 생활 문화에 바탕한 예술문화를 만개한다.

그러나 19C를 지나면서 조선이 세도정치와 혼란으로 깊게 병들어 가면서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문화예술은
결코 탐욕스런 관리가 판치거나, 시민의 삶이 어려운 난세에서는 꽃피우지 못한다. 어쨌든 조선 풍속화로 인해 한국
인의 18C는 더욱 향기롭고 정감이 간다. 풍속화는 해학과 익살, 풍자를 즐긴 한국인의 기질을 화폭에다 여지없이 그
려냈다. 그리고 따뜻함, 정다움, 여유, 은근함, 서정성을 풍기면서 사람사는 모습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려냈다. 가
만히 바라보시라.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빙그레 웃음이 묻어나오는 자신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
과 색채, 예술적 회화기법 등에도 충실하여 예술적 품격을 지켜 나갔다.
 
조선시대가 낳은 놀라운 미술의 걸작, 즉 민화는 꾸밈없이 살아온 서민의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구입하고 좋아한 사 람은 사대부 양반이 아님은 분명하다. 민화는 떠돌이 화가나 지방의 그림쟁이들이 서민들과 함께 한 그림으로써, 민 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며, 어느 정도 문자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싸게 팔았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에서 민화는 민속적 유물일 수도 있고 역사적 유산일 수도 있게 된다. 살펴보면 민화가 민속화로써 지닌 적극적인 미감美感은 그간의 일반회화에서 볼 수 없는 미감이 있다. 민화의 표현에는 해학적 성격과 특징, 즉 독특한 한국 맛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화와 일반회화의 조형적 가치처럼 동일한 조형원리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 회화는 먹의 농담처리와 설채設彩라는 재료 및 기법상의 특징으로 화면의 깊이나 대상의 리얼리 티가 보다 효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민화는 이처럼 전통회화의 사군자라 수묵화처럼 감상화 의 격식을 차린 그림이 아닌 자연스러운 표현이기에 친근함이 더하는 그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민화들은 거의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민화의 연원은 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민화에 있어서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화의 몇몇 주류를 조선후기 민화에서만 찾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민화를 역사적으로 볼 때 단순히 조선조 후기에 나타난 국지적이고 경향적인 어떤 미술 현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엄밀히 말해서 민화는 선사시대의 모든 원시 미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고, 특히 우리들의 경우에 있어서 민화가 갖은 소재나 주제들은 청동기나 석기 시대의 암각화에 이어지며 보다 많은 공통점들이 삼국 시대의 고분벽화나 그 유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민화의 맥락을 이렇게 통시적으로 깊게 설정하면, 이들 민화로 불리는 그 림들은 유구한 전통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느 나라든 예술에 있어서 일반 서민들이 우러러 볼 수밖에 없게 권위를 나타내면서도 화려하고 품위를 갖춘 예술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의 예술에서도 위엄과 품위를 나타내고 있는데, 궁중, 양반가의 예 술로서 도화서에서 정규수업을 받은 화가나 그에 버금가는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따라서 이와는 반대로 민중의 생활 문화로서, 사대부가의 예술에서 벗어나 독자적 자기양식을 창조한 그림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민화인 셈이다. 이러한 민화는 19세기로 내려올수록 그 본래의 내용과 무관해지면서 자신들의 정서에 맞닿는 자유분방한 형식미를 창출하고 있다.

한편, 민화 속에는 불교나 유교의 지향하고 있는 그런 이념의 요소가 있지만, 민화가 진정 이것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 표현의 매체나 방법이 토착적이고 민중적인데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민화는 확실히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 고 있다. 민화의 정신은 무엇을 어떻게 잘 그리느냐는 것보다도 부적처럼 주술적인 내용을 소재의 세계를 어떻게 조 화시키느냐에 크게 관심을 보인다. 이때 대부분 화가의 서명이 없고 그림의 솜씨도 어딘가 덜 세련되었으며, 그리는 사람이 달랐지만 기술적으로 표현이 비슷한 것이 많다. 이는 또한 특징적인 면에서 서로 "모방한 것이 많다"는 것이 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민화가 기술적으로 세련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시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민화를 어떻게 어울리게 그렸는가가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예컨 대, 그 속에는 해학적인 새로운 자유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화는 주변의 생활과 자연에 접하는 삼라만상이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는데, "민화의 소재들은 그 자체가 화가 의 임의의, 혹은 창의적인 선택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음양의 상생상극의 자연적인 원리에 부합되는 대상을 재발 견한다는 의미에서 복제되었으며, 이런 자연스러운 소재가 곧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을 해학적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 이처럼 민화의 소재가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자연이 지니는 조화의 사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화의 매력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선과 색 면이 섬세하게 결합됨으로써 장식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해학적 감 성을 유발하는데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민화에는 질, 크기, 쓰임새, 재료 등에서 다양하고 모두가 생생한 빛깔로 그려졌으며, 표현에 있어 생동감이 없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해학적 상징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