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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경 삼국중 가장 먼저 건국되어 중국대륙에서 위세를 펼쳤던 나라이다.
그리고 19대 광개토대왕 시대에 만주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광대한 지리적 풍토와 외세의 영향을 받아 길러진 활달하고 늠름하고도 분방하며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기상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도 힘과 정열이 넘쳤다. 고구려의 뛰어난 작품들을 보면
그 활기찬 움직임과 웅혼한 기상, 풍부한 상상력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 만다. 백제는 부여족의 일파가
한반도의 서남부로 이동하겨 옛 삼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 불교적인
것을 가미한 높은문화를 형성하였다.
백제는 일찍이 중국의 남조와 해상교통이 열렸으므로 대륙의 감화를 받았고, 남으로는 일본의 아스카시대의
불교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백제의 미술은 매우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되었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 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다.
신라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지역적 조건 밑에서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이루었다. 신라의 미술은 소박한
가운데 조화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의 미술은 중국의 남조 문화와 고구려, 백제등과 접촉하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5세기 후반에 전래된 불교의 영향으로 더욱 화려하고 독특한
종교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고분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 당시의 뛰어난 공예 예술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미술은 전체적으로 보면 이웃했던 고구려나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엄격하고 추상적인 성격을 띠고있다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고 중국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전체적인 문화 수준의 향상을 이루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삼국 시대에 비해 보다 화려하고 원숙하며 또 국제성이 강하였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원효나 의상, 혜초와 같은 고승이 있어 불교의 대중화가 가능했으며, 참선과 사색으로 진리를 깨우치는
선종(교종이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여러 그림과 불상을 조각한 반면)이 들어와 한때 불교 미술의 침체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불교가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면서 통일 신라의 미술은 삼국 시대의 고졸함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풍요로워졌으며, 뛰어난 불교 미술품으로 현재까지도 당시의 미적 감각이나 미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시대 미술은 비록 사실적인 기법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실물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작품 속에서 통일된 조화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무르익은 기교로써 이상적인 조화의 미를 창조하려는 것이 곧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징이었다.
고려 태조는 그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또 불교를 국교로하고 국력을 기울여 사찰과 탑을 세웠다.
신라의 미술을 계승한 고려의 미술은 근 200년간 불교미술의 발달과 송나라 미술의 영향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귀족적인 미술문화를 남겼다. 특히 불교적으로 볼때 7세기 중엽에 들어온 밀교를 이용하여 문두루 도량과
사천와 도량의 설치 및 비밀작법을 통해 외적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무수한 행사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후기의 2백 70년간에는 밖으로는 몽고의 침략, 안으로는 여러가지 국난 등에 의해 나라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 특히 무엇보다 우리역사상 큰 타격을 입게 된것은 25대 충렬왕 이후로 고려의 자주력이 줄고 원의
간섭하에 들어간 것이다.
거란·여진·몽고등 북방 민족들의 잇단 침략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미술의 탐미주의는 이시기에 무수한 전쟁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 정치적 투쟁의 격정과 원한, 인생에 대한 감상적 정서, 고통 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들은 현실과 이상을 분류 시키고 예술가의 심리적 경향은 현실 도피로 기울어지고
아름다움에 탐닉해 들어감으로서 예술에 나타나게 되는 경향은 탐미주의가 되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전체적으로 통일적인 힘보다는 개별화되는 개성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입체성보다는 선적인 표현이 두드러져 나타나게 된것이다.
이런 고려가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등 중국의 왕조들과 문화적 교류를 빈번히 하면서 미술
양식을 수용하여 자체의 미술을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제1의 명예를 지니고 있는
고려자기는 송으로의 모방에서 비약한 것이며, 서화에 사군자를 특히 숭상하게 된것도 원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려시대의 모든 미술이 시종 완벽을 지향했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지 모르나 이 시대 미술의
주된 경향은 역시 귀족적 문화를 구현하는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시대에는 도자기, 칠기, 금속등의 공예가 발달하였고, 특히 상감청자의 독특한 기법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며, 회화 역시 다양한 기법과 양식의 불화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와 비교하여 같은 미술 계통에서도 분야에 따라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 미술에서도 불교 회화와 공예는 호화롭고 정교하여 아취가 넘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지만, 불상이나 불탑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다소 균형이 깨지고 경직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고려시대의 불상이나 불탑등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또한 중앙과 지방과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조선 시대의 회화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가장 크게 발전하였다. 고려시대 회화의 전통을 발판으로 건국
초부터 도화원이 설치되었고, 중국의 다양한 화법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중심으로 회화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사대부와 화원들이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나무, 산수, 인물, 화초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졌으나 감상을 위한 산수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초상화는 동양의 삼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인물의 정확한 묘사와 미묘한
정신 세계의 표출은 괄목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 회화는 화풍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년∼약1550년), 중기(약1550년∼약1700년), 후기(약 1700년∼약1850년), 말기(약1850년∼1910년)로 나누어지는데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① 초기(1392년∼약1550년)
조선 초기 회화는 북송의 곽희파 화풍을 받아들여 그것을 우리나름의 새로운 양식으로 개성있게 창조한 화가
안견에 의한 안견파 화풍이 주류를 이루면서 명대의 원체 화풍과 절파浙派 화풍의 유입과 이상좌에 의한 남송의 마하파류의 화풍이 전개되었고 이장손과 서문보의 그림에서 보이는 미법산수화풍도 보인다.
조선 시대의 회화 발달과 관련하여 맨 먼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초기, 그 중에서도 세종 때를 중심으로 한 15세기가 된다. 이 시기에 이미 안견과 강희안을 비롯한 거장들이 배출되어 격조 높은 한국적 화풍을 성취하고, 후대의 회화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이 때에 형성된 한국 화풍의 전통은 초기의 성종 때를 거쳐,
명종 초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로도 중기 회화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 축적되었던 중국의 화적이 다수 전승된 것 외에, 연경을 중심으로 한 명과의 회화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주요 학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토대가 되었다.
먼저 북송의 이성과 곽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소위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이, 두번째는 남송의 화원 마원과 하규가 형성한 마하파 화풍을 위시한 원체화풍이, 세 번째는 명대의 원체 화풍이 전래되었으며,
네 번째는 절강성 출신인 대진을 중심으로 명초에 이룩된 절파 화풍이, 다섯번째는 북송의 미불, 미우인 부자에 의해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등에 의해 발전된 미법 산수화풍이 전래되었다.
조선 초기의 화가들은 이러한 화풍들을 철저히 소화하고 수용하여, 중국 회화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특색있는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몇 가지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산수의 형태는 더욱 다듬어지고 공간은 더욱 넓어지며, 한국적 준법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16세기의 화가들은 이미 한국화된 15세기의 화풍에 집착하는 전통주의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세종 때 이래의 조선 초기의 문화가 뿌리를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진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금강산도, 삼각산도 등이 화원들에 의해 활발하게 제작되어 실경산수의 전통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② 중기(1550∼1700)
이 시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대란이 잇달아 생기고 사색붕당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색있는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는 첫째 조선 초기 강희안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 화풍이 김시, 이경윤, 김명국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고, 둘째 이정근, 이홍효, 이징 등에 의해 조선 초기의 안견파 학풍이 추종되고 있었으며,
셋째 이암, 김식, 조속 등에 의해 영모나 화조화 부분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고,
넷째 묵죽, 묵매, 묵포도 등에서도 이정, 어몽룡, 황집중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이 밖에도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조선 중기에 이처럼 회화가 발전될 수 있었던 까닭은 조선 초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사실 중기의 화가들은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다. 또한 이 시대의 화가들은 한가지 화풍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두서너 가지의 화풍을 수용하여 그리는 경향을 현저하게 나타냈다. 이 밖에도 이 시대에는 사대부와 화원들 중에 화가 집안을 형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의 회화도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가미하면서 조선 중기 특유의 양식도 발달시켰다.
이 시대는 수묵화의 전성기라고 지칭해도 좋을만큼 묵법에서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다양한 주제의 구사, 상이한 화풍의 수용, 변화있는 필묵법 등은 이 시대의 회화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현상들로 주목된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 때문이었는데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아직 적극적으로 유행되지 못했다.
③ 후기(약 1700년∼약1850년)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세종 때부터 꽃피웠던 조선 초기의 회화와
비교되는 훌륭한 것이다. 초기의 회화가 송, 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했던 데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 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 의식을 발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 및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
자아의식을 토대로 크게 대두되었던 실학의 발전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이시대는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에 풍미하였다.
이러한 후기의 회화는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이 기반을 둔 이 시대 회화의 조류로는
첫째, 조선 중기이래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이다.
둘째,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가 겸재 정선일파를 중심으로 해 크게 발달한 점이다.
셋째,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에 의해 풍미하게 된 점이며,
넷째,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어느 정도 수용되기 시작했던 사실등을 들 수 있다. 남종 화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전대에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이 남종화법의 유행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남종화법의 전개에는 남종 문인화론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이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어, 역시 참신한 화풍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후기의 강세황, 이인상, 신위, 그리고 말기의 김정희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④ 말기(약1850년∼1910년)
이 시기에는 후기에 유행한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그 대신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더욱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경향은 김정희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희룡, 허유, 전기 등 이른바 추사파와 윤제홍,
김수철, 김창수 등의 학산파 그리고 홍세섭 등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간주된다. 김정희 일파가 남종화법을
다져놓는데 기여했다면 윤제홍 일파와 홍세섭 등은 남종화법을 토대로 세련된 현대적 감각의 이색 화풍을
형성하는데 그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남종화법의 토착화는 한국 근대 및 현대의 수묵화가 외향적으로는
남종화 일변도의 조류를 형성케 한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회화는 중국 청대 후반기 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8세기 조선후기 회화의 전통을 이어 전 시대 못지않게 뚜렷한 성격의 화풍을 형성하였고,
또 근대 회화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었다.
조선 말기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현상은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이 시대의 화단을 풍미했다는
사실이다. 김정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뛰어났으며, 서예에서는 파격적인 추사체를 이루어 우리나라 서체를
일변시켰고 회화에서는 남종화 지상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이처럼 한국적인 화풍이 크게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추사 김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 의해 남종문인화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 후기의 토속적인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김정희의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 다진 소치 허련과 함께 오원 장승업이 배출되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형성하고 제자들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등을 통해 현대 화단으로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이 중국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점은 아쉽게 생각된다.
19세기 말엽 서구 문물의 영향은 미술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며, 일제의 억압과 전란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전통미술은 꾸준히 계승·발전되어 왔다. 이 시기에 서구의 조형양식이 들어와서 미술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표면적으로는 전통의 단절이라는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서양화를 중심으로 한 전위미술 대열은
한국 미술의 국제적인 진출에 노력하였다.
일제의 억압 밑에서 전통미술을 가꾸고 발전시킨 화가는 조석진, 안중식, 김규진, 고희동등이고 이를 계승 발전시킨 화가는 허백련,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배렴, 변관식등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 나라의 회화는
다양한 재료의 개발과 함께 우리의 풍토 및 정취를 표현의 중심으로 하는 특성을 발전시켜 왔다.
한편 진취적인 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구본웅,
도상봉, 이인성, 김종영 등이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 이상범, 전통적인 한국적 남종화에 능했던 허백련을 비롯해,
거친 필치의 적묵법을 사용해 진경산수의 금강산을 그린 변관식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창조적이고 독자적인 모습의 화풍을 이루었다.
1908년 고희동의 동경 유학으로 최초의 서양화가 도입되었다. 뒤를 이어 김관호가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나혜석과 같은 최초의 여성 화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 후 양화에는 야수파적 성향의 표현을 한 이중섭, 도터운 표면
질감과 회색조의 소박한 감각을 표현한 박수근, 한국적 분위기의 독특한 추상화로 유명한 김환기, 전통적인
인상파 화풍의 오지호, 토속풍의 그림을 즐겨 그린 박상옥등의 화가들이 화단을 빛냈다.
1952년부터는 국전을 통해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현대 미술은 세계적인 미술을 지향하면서 각종 국제 교류전에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비디오 아트와 행위예술과 같이 여러 가지 재료와
기법을 이용한 표현방법의 다양화로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