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어린이관 > 서예 > 한국서예사
 

한자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대체로 고조선시대이므로 한국의 서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또한 고려시대까지의 진적(眞蹟)도 10여 점에 불과하고 조선시대의 것 역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진필(眞筆)은 아니더라도 전하고 있는 상당수의 비갈(碑碣)·금문(金文)·묘지 등을 통해 서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가 많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이 다량으로 흘러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다 하여
왕희지체를 본보기로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병행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송설체에 가장 능한 서가는 고려의 이암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이다. 이용의 글씨는 송설체를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을 나타냈다. 당시의 최고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에는 호탕하고 늠름하며 품위 또한 높아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 이전에 서명(書名)이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妾希顔)·성임(成任)·정난종(鄭蘭宗)·소세양(蘇世讓)·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의 문징명·축윤명(祝允明)의 서풍도 들어와 함께 행하여졌다. 그러나 대체로 신라나 고려에 비하면 품격과 기운에서는 다소 쇠퇴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적 추이였다. 한편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조선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그것은 송설체가 외형적인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나머지 박력이 없이 나약한 데로 흐르는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어떠한 변혁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마침내 유학계에서 일기 시작한 복고사상(復古思想)의 경향에 힘입어 왕희지의 서법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가가 한호이다. 그는 한국 서예사상 뛰어난 사람으로 진체(晉體;왕희지풍의 체)를 연마하여 해서·행서·초서에 능하였다. 그의 글씨는 중국인들에게까지 극찬을 받았으며, 후대에 전승되어 <석봉체(石峰體)>라 불리었다. 그러나 품격이 낮고 운치와 기백이 부족하여 외형미만을 추구하는 데 그쳤으므로 누기(陋氣)와 속기(俗氣)가 많았다.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글씨는 기백과 품격이 떨어지고 속기가 배제되지 않았다. 윤순(尹淳)은 각 체에 능하였는데 특히 행서에서 여러 서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 이광사(李匡師)는 새로운 발상으로 서법의 혁신을 시험하여 《원교서결(圓嶠書訣)》을 지어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법의 바른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역량에도 한계가 있어서 필력과 품격이 그의 스승인 윤순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밖에도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는 강세황(姜世晃)이 있는데, 윤순·이광사와 함께 <3대가>라고 불렸으며, 미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18세기 말 청나라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금석학이 발달하면서부터 문자의 근원인 고문·전서·예서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글씨를 쓰는 서가들도 현행하는 해서와 행서 이전의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추구하여, 옛 서체의 운필을 배워 해서와 행서에 임하였다. 청나라 고증학자·금석학자의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신위(申緯) 등이 있고, 이들보다 약간 후진으로는 김정희(金正喜)·권돈인(權敦仁)·이상적(李尙迪)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서예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사람이 김정희이다. 그는 처음 안진경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모방하여 한동안 구양순체를 썼으나, 차츰 독창적 서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前漢隸)에 두고 이 법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전통적인 서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서법을 시도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서법은 파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근대적 미의식의 표현을 충분히 발휘하고 중국 서법에 대한 숭상과 추종으로부터 한국 서예의 자주적인 가능성과 의지를 확연히 나타냈던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므로 <추사체(秋史體)>라고 불리는 그의 특출한 서체의 출현은 한국 근대서예의 뚜렷한 기점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모두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제자에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었으나 그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