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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대체로 고조선시대이므로 한국의 서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또한 고려시대까지의 진적(眞蹟)도 10여 점에 불과하고 조선시대의 것 역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진필(眞筆)은 아니더라도 전하고 있는 상당수의 비갈(碑碣)·금문(金文)·묘지 등을 통해 서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못지않게 서예문화가 융성하였다. 그러나 진적으로는 몇 점의 고문서와 말기에 작성된 수십 점의 사경이 남아 있고 그 밖에 진가가 확실하지 않은 명인의 글씨 몇 점이 남아 있을 뿐, 서예자료로 다루어야 할 것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비석과 묘지 등 금석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목판서적의 글씨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서체가 지배적이었으며, 행서는 역시 왕희지풍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중기에 이르러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은 고승 탄연(坦然)이 구양순체 일색이었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안법(顔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비(文殊院碑)> <승가사중수비 (僧伽寺重修碑)>를 썼다. 그러나 12세기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문학·예술 전반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13세기 말엽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후기에는 특히 충렬왕 이후에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 조선 전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1314년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나라 명사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조맹부는 원나라를 대표하는 글씨의 명가로서 충선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중에는 조맹부의 서법을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 명가가 이암·이제현(李齊賢)이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많은 문적과 서화를 들여왔으므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유행된 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고려 말기의 대가로는 이암·한수(韓脩)·권주(權鑄)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암은 특히 송설체를 깊이 터득하여 행서·초서에 뛰어난 대가로서, 문수사장경각비(文殊寺藏經閣碑)의 글씨를 남겼다. 한편 고려시대 서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비갈과 함께 주목받는 것이 묘지이다. 비갈은 지상에 세우는 것이므로 대부분 심력을 쏟아서 쓴 작품인 데 반하여, 묘지는 땅속에 묻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필하여 자연스러운 자세로 쓰는 것이 보통이므로 비갈과는 다른 친근감을 준다. 또한 서체가 다양하고 교졸(巧拙)의 차가 많고, 필자를 밝힌 것은 몇 점에 불과하지만, 모두 정확한 연대가 새겨져 있어 각 시대 서법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